闲山:龙的出现

한산: 용의 출현,闲山岛海战,한산도대첩,Hansan: Rising Dragon

主演:朴海日,卞约汉,安圣基,孙贤周,金成圭,金成畇,金香起,玉泽演,孔明,朴智焕,赵在允,李瑞埈

类型:电影地区:韩国语言:韩语年份:2022

《闲山:龙的出现》剧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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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闲山:龙的出现》长篇影评

 1 ) 英雄史诗,不是这样拍的。

浸润多年,我对朝鲜王朝的历史也充满着感情和敬意。

尤其是壬辰战争,明朝和朝鲜联军浴血奋战,击溃了强大的倭军。

李舜臣则是朝鲜民族伟大的英雄,因此,多年以来,壬辰战争电影中,“不灭的李舜臣”抗击倭军是这类题材的重要核心主题。

从前看过《鸣梁海战》,这一部《闲山岛海战》,大体的思路也是如此,展示李舜臣所面对的艰难困局,他坚韧不拔,智慧和勇气都超乎常人,可以凭借一己之力,力挽狂澜。

电影技术的进步,倒置剧情的浮夸。

跟《鸣梁海战》一样,朝鲜海军对付倭军,龟船的战斗力被无限拔高,消灭敌人,简直就是摧枯拉朽。

如果真有这样的战斗力,那可以说是天下无敌了。

怎么还需要战斗八年呢?

我深切了解,李舜臣将军是韩国史上伟大英雄,但是这种脱离历史事实,剧情浮夸,不仅损害了电影的艺术性和感染力,也损害了说服力。

每次看完这类电影,我们总会问,这是真的吗?

难以置信。

塑造人物,还是要从人物本身着手,这部电影里对李舜臣的塑造是扁平的,重点全放在神乎其神的龟船海战上,而我们看不到一个能感染观众,触动心灵的伟大英雄。

 2 ) 闲山岛大捷 闲山海战 闲山岛战役的历史

闲山岛大捷又称闲山岛海战,是1592年8月14日朝鲜与日军在闲山岛附近的一场重要海战。

朝鲜将领李舜臣的水军在此次海战中击沉63艘日船。

为了与朝鲜水师进行决战,日本水师在巨济岛一带集结,准备兵分三路向朝鲜水师发动进攻。

而李舜臣则将其全罗道的舰队和庆尚道的部分舰队组成联合舰队,准备迎战。

1592年7月6日,李舜臣进兵出唐浦附近水域,并于7月8日清晨,将集结于巨济岛的日本水师引至闲山岛附近水域决战。

李舜臣选择在此地决战是因为这里有著较为宽阔的深水环境,易于设置埋伏,可以向日本舰队进行包围歼灭。

1592年8月13日有平民回报说看到倭舰在巨济岛附近集结。

得到消息后的第二日清晨,李舜臣派出6艘板屋船去引诱日舰。

胁坂安治的海军见到板屋船后,马上追踪上来,一直追到闲山岛附近的广阔海域,与李舜臣的海军相遇。

在李舜臣与日军的前两次交锋中,李舜臣采用的是线型或圆型的连续式的进攻阵型。

虽然这种战术对于击溃敌方舰队很有效,但是也会让很大一部份的敌舰得以逃脱,这样无法有效消灭敌方军力。

为了克服这个缺点,李舜臣在此次海战中摆出了新型的鹤翼阵或称U型阵,意在不但要击溃日本舰队还要将之包围进而歼灭。

日军的战术是先派出快速的军舰突击然后迅速派出主力战舰靠近并登船。

日军的这种战术正中李舜臣的圈套。

朝鲜海军以鹤翼阵将接近的日舰包围住,舰上炮火从各个角度将被围的日舰摧毁。

战斗从早上一直打到傍晚。

在丧失了59艘战舰后,胁坂安治开始撤退,朝鲜水军获得大捷。

李舜臣事后在“见乃梁破倭状”中宣称击毁的日本舰队为大船36只、中船24只、小船13只、击破数63只,但是根据胁坂安治领地的石高算出的动员定数大约为1500人,这个战果数应当是过高了(次年5月日军攻击晋州城时胁坂军统计为900人,而且之前有相当一部分日军士兵回国休整,因此此战日军伤亡应较低)日本水师依然掌握着制海权。

朝鲜国王后来命令李舜臣主动攻击日军补给线,但被李舜臣拒绝。

这在日后也成为了李舜臣被撤职的一个主因。

 3 ) 一如既往,脸可真大啊!

带着瞻仰世界三大元帅之首李舜臣上将军指挥世界四大海战之一的闲山海战之神迹的心情看了这部影片。

虽然逻辑、史实、主题方面可能连盗版读本儿歌三百首都不如,但是论水战的画面效果及剧情的流畅性还远不是上、下赤壁这两坨翔能碰瓷的。

不提机器人一样的男主肩上镶的那两条金龙有多离谱了(别跟我说是充电口),我就想问就凭女主这点姿色你是怎么设计出让身为敌军主将的大boss对她私定终身、处处留情,就算被物理扎心也要一舔到底的剧情的?

你凭什么?!

得亏是氛围不合适,不然我丝毫不怀疑您借机秀一把朝鲜军团欧巴们的无上魅力,安排他们将倭军女眷乃至猴王亲女个个迷得神魂颠倒、欲仙欲死,以至其前赴后继地穿过倭奴男人们的重重封锁将情报送入男神们的怀中。

This safeguarded Ming to the West and reversed the tide of war.一如既往,脸可真大啊!

 4 ) 大场面挺有看头,期待史学大牛点评科普

听说花了不少预算,看来相当一部分花在了游戏美工上吗?

类似无人机航拍海上百艘旗舰大战的时候,还蛮壮观的,挺有感觉。

大致做到有点有面。

不过应该历史的考证不多,所以细节就无法太细。

不知道编剧尽力了没有,给男主将们的发挥空间挺小的感觉,常常就是凝重脸,沉静脸,坚毅脸,紧张脸,看起来没啥变化。

当然作为一个剧,还是有不少小段很像舞台剧。

比如那个女侍,咬掉牙毒以后流血昏迷几天,又可以送信又可以那啥了。

期待有史学大牛,借此来科普一番。

百艘战船,在500多年前,总司令怎么给各船长下命令,船长又怎么给每艘船的不同分工下不同的命令,这一个发,那边一个收,都挺有讲究吧。

 5 ) 《闲山:龙的出现》:给力龟甲船

朝鲜民族英雄李舜臣三大海战,《闲山海战》《鸣梁海战》《露梁海战》,均取得了胜利。

先拍了《鸣梁海战》,这部《闲山海战》作为前传出现,《露梁海战》还没有拍。

露梁海战是中朝联军抵抗日军,取得胜利,但李舜臣战死。

本片没有《鸣梁海战》刺激紧张,不妨一看。

有人吐槽本部的李舜臣没有表情变化,然而作为主将,不应该这样沉稳吗?

哈哈所谓“龙的出现”,指朝鲜海军研制出的一种速度极快的龟甲船,前面装有坚硬无比的龙头,还能发射炮弹。

朝日海军对决时,龟甲船的出现逆转了战局,使朝鲜海军取得大捷。

影片最后李舜臣用箭射中了日军统领胁坂安治,历史上真实的胁坂死于京都。

有个角色——日本士兵,为了追求正义,而宣誓效忠李舜臣,帮助朝鲜打日本。

这是韩国制片人的意淫吗?

投降李舜臣的日本兵

私信+++qun:

 6 ) 电影还没出,但是写在前面。

其实吧,电影工业来说,应该要好好看看这部片的,但多半不能达到当年那种高票房了,原因可能不是没有当年的技术好,而是观众的期待值的问题。

预测后面的评论又是一通宇宙国呀,小渔船,村斗之类的,我觉得大可不必,历史方面先不说,电影工业来说的话韩国已经是亚洲最强各位没意见吧。

韩国现在是吸收了众家所长,自从近几年上一辈艺术类韩国导演作品变少以后,现在韩国影视几乎都是十分商业,但抵不住人家良性循环呀,如果喜欢过去那种艺术片口味的话,每年那么多商业片中还是可以挑出些颇具艺术气息的,为啥汤唯要嫁韩国导演,多半他也看出来了,我国内的影视氛围大概率出不了好作品,说来也悲哀,这并不是有没有钱的事情,我国影视行业从来都不缺钱,但是行业内的猫腻太多,也许电影体系里所有方面都是好的,但就是出不了好作品,就比如好导演.好编剧.好演员.全都集齐了,但演员拿走了60%,编剧1%,剩下的服道化只有5%,这样也绝对出不了好作品,遥望20年前韩国拍了很多那种屎尿屁的喜剧片,当时真的觉得很好笑,相信那些电影成本也不高,但人家就是出效果啊(比如任昌丁.崔成国之类的演员,可以看出人家演员的用力演出),所以,有时候看韩影真不该一味调笑人家,应该好好看看人家的演员.导演.编剧是如何“用心”在做自己的本职工作的。

 7 ) 看到十几分钟,有几张地图实在看不下去了

日本国和韩国很大,都是宇宙国!

日本国和韩国很大,都是宇宙国!

对对对,导演说的对,日本国和韩国都很大,都是超级大国!

壬辰倭乱的时候是大国,现在更是不得了!

辽东半岛和山东被半岛估计是被导演吃了!

导演千万别说图里两个“小撅撅”是辽东半岛和山东半岛,这么一点点可赶不上导演的脑仁大!

对对对,导演说的对,日本国和韩国都很大,都是超级大国!

壬辰倭乱的时候是大国,现在更是不得了!

辽东半岛和山东被半岛估计是被导演吃了!

导演千万别说图里两个“小撅撅”是辽东半岛和山东半岛,这么一点点可赶不上导演的脑仁大!

对对对,导演说的对,日本国和韩国都很大,都是超级大国!

壬辰倭乱的时候是大国,现在更是不得了!

辽东半岛和山东被半岛估计是被导演吃了!

导演千万别说图里两个“小撅撅”是辽东半岛和山东半岛,这么一点点可赶不上导演的脑仁大!

 8 ) 闲山岛大捷 闲山岛海战 闲山岛战役的历史

闲山岛大捷又称闲山岛海战,是1592年8月14日朝鲜与日军在闲山岛附近的一场重要海战。

朝鲜将领李舜臣的水军在此次海战中击沉63艘日船。

为了与朝鲜水师进行决战,日本水师在巨济岛一带集结,准备兵分三路向朝鲜水师发动进攻。

而李舜臣则将其全罗道的舰队和庆尚道的部分舰队组成联合舰队,准备迎战。

1592年7月6日,李舜臣进兵出唐浦附近水域,并于7月8日清晨,将集结于巨济岛的日本水师引至闲山岛附近水域决战。

李舜臣选择在此地决战是因为这里有著较为宽阔的深水环境,易于设置埋伏,可以向日本舰队进行包围歼灭。

1592年8月13日有平民回报说看到倭舰在巨济岛附近集结。

得到消息后的第二日清晨,李舜臣派出6艘板屋船去引诱日舰。

胁坂安治的海军见到板屋船后,马上追踪上来,一直追到闲山岛附近的广阔海域,与李舜臣的海军相遇。

在李舜臣与日军的前两次交锋中,李舜臣采用的是线型或圆型的连续式的进攻阵型。

虽然这种战术对于击溃敌方舰队很有效,但是也会让很大一部份的敌舰得以逃脱,这样无法有效消灭敌方军力。

为了克服这个缺点,李舜臣在此次海战中摆出了新型的鹤翼阵或称U型阵,意在不但要击溃日本舰队还要将之包围进而歼灭。

日军的战术是先派出快速的军舰突击然后迅速派出主力战舰靠近并登船。

日军的这种战术正中李舜臣的圈套。

朝鲜海军以鹤翼阵将接近的日舰包围住,舰上炮火从各个角度将被围的日舰摧毁。

战斗从早上一直打到傍晚。

在丧失了59艘战舰后,胁坂安治开始撤退,朝鲜水军获得大捷。

李舜臣事后在“见乃梁破倭状”中宣称击毁的日本舰队为大船36只、中船24只、小船13只、击破数63只,但是根据胁坂安治领地的石高算出的动员定数大约为1500人,这个战果数应当是过高了(次年5月日军攻击晋州城时胁坂军统计为900人,而且之前有相当一部分日军士兵回国休整,因此此战日军伤亡应较低)日本水师依然掌握着制海权。

朝鲜国王后来命令李舜臣主动攻击日军补给线,但被李舜臣拒绝。

这在日后也成为了李舜臣被撤职的一个主因。

이때 동래(東萊)가 이미 함락되어 왜적들이 계속 몰아쳐 곧장 진격하니 가는 곳마다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대가가 이미 서로(西路)로 들어가자 황해도 이남에서 동래까지 오직 패전 소식만 들려오고 전혀 다른 소식은 없었다.그런데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은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과 약속하여 한산도(閑山島)에서 회합하였다. 이때에 이순신이 전선(戰船) 80척을 거느리고서 마침내 이해 5월 6일에 옥포(玉浦) 앞바다로 나아가니, 적선(賊船) 30여 척이 사면에 휘장을 두르고 길다란 장대를 세워 홍기(紅旗)·백기(白旗)들을 현란하게 달았으며, 나머지 왜적들은 육지로 올라가 마을 집들을 불사르고 겁탈하였다. 왜적들은 수군(水軍)을 보고는 노(櫓)를 빨리 저어 진지(陣地)를 나와 아군(我軍)과 바다 가운데서 만났는데 아군이 적선 26척을 불살라 버렸다. 이튿날 다시 대전(大戰)을 전개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행행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여러 장수들이 도착하지 않아, 그대로 서로 모여 통곡하고는 마침내 9일에 제각기 본진(本鎭)으로 돌아갔다.29일에 순신과 원균이 재차 노량(露梁)에서 회합하여 적선 1척을 만나 불살라버렸는데, 조금 후에 보니 바닷가 한 산에 왜적 1백여 명이 장사진(長蛇陣)을 치고 있고 그 아래로는 전선 12척이 벼랑을 따라 죽 정박하고 있었다. 때마침 일찍 들어온 조수(潮水)가 벌써 빠져나가 바닷물이 얕아져서 큰 배는 나아갈 수 없었다. 순신이,"우리가 거짓 퇴각하면 왜적들이 반드시 배를 타고 우리를 추격할 것이니 그들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큰 군함(軍艦)으로 합동하여 공격하면 승전(勝戰)하지 못할 리가 없다."하고서, 배를 돌렸다. 1리를 가기도 전에 왜적들이 과연 배를 타고서 추격해 왔다. 아군은 거북선으로 돌진하여 먼저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쏘아대어 왜적의 배를 모조리 불살라버리니, 나머지 왜적들은 멀리서 바라보고 발을 구르며 울부짖었다. 한창 전투할 적에 철환(鐵丸)이 순신의 왼쪽 어깨를 명중하였다.2일에 당포(唐浦)에 도착하니 적선 20척이 강 연안에 죽 정박하였는데, 그 중에 큰배 한 척은 위에 층루(層樓)를 설치하고 밖에는 붉은 비단 휘장을 드리워놓고서, 적장(賊將)이 금관(金冠)에 비단옷을 입고 손에 금부채를 가지고서 모든 왜적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중위장(中衛將) 권준(權俊)이 배를 돌려서 노를 재촉하여 바로 그 밑으로 돌진하여 그 배를 쳐부수고, 적장을 쳐다보고 활을 쏘니 시위를 놓자마자 적장이 거꾸러졌다. 4일에 당포(唐浦) 앞바다로 나아가자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李億祺)가 전선 25척을 거느리고 와 회합하니 여러 장수들이 기운이 증가되지 않는 이가 없었다.5일에 외양(外洋)으로 나가다가 적선이 고성(固城) 당항포(唐項浦) 앞바다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듣고, 순신이 배 3척을 먼저 보내어 형세를 정탐하도록 하였는데, 겨우 바다 어귀를 나가자마자 바로 포(砲)를 쏘아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모든 군사들이 일시에 노를 재촉하여 앞뒤를 고기꿰미처럼 연결하여 나아가 소소강(召所江)에 이르니 적선 26척이 강 연안에 죽 벌여 있었다. 그 중에 큰배 한 척은 위에 3층 판각(板閣)을 설치하고 뒤에는 검은 비단 휘장을 드리우고 앞에는 푸른 일산을 세워 놓았으며, 휘장 안에는 여러 왜적들이 죽 나열하여 시립하고 있었다. 모든 군사들이 처음 한번 교전하고 거짓 패한 척하여 퇴각하니, 층각을 세운 큰배가 돛을 달고 먼저 나왔다. 모든 군사들이 양쪽에서 공격하니 적장이 화살을 맞고 죽었다. 그러자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 불을 질러 적선 1백여 척을 소각해 버리고 왜적의 머리 2백 10여 급(級)을 베었으며 물에 빠져 죽은 적은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었다. 6일에 잔여 왜적을 외양(外洋)에서 추격하여 또 한 척을 불살라버렸으며, 9일에 모든 군사가 전투를 중지하고 본진으로 돌아왔다.7월 6일에 순신이 억기와 노량에서 회합하였는데, 원균은 파선(破船) 7척을 수리하느라 먼저 와 정박하고 있었다. 적선 70여 척이 영등포(永登浦)에서 견내량(見乃粱)으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8일에 수군이 바다 가운데 이르니, 왜적들이 아군이 강성한 것을 보고 노를 재촉하여 돌아가자 모든 군사가 추격하여 가보니, 적선 70여 척이 내양(內洋)에 벌여 진을 치고 있는데 지세(地勢)가 협착한 데다가 험악한 섬들도 많아 배를 운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군이 진격하기도 하고 퇴각하기도 하면서 그들을 유인하니, 왜적들이 과연 총출동하여 추격하기에 한산(閑山) 앞바다로 끌어냈다.아군이 죽 벌여서 학익진(鶴翼陣)을 쳐 기(旗)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떠들면서 일시에 나란히 진격하여,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연속적으로 쏘아대어 먼저 적선 3척을 쳐부수니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조금 퇴각하니, 여러 장수와 군졸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발을 구르고 뛰었다. 예기(銳氣)를 이용하여 왜적들을 무찌르고 화살과 탄환을 번갈아 발사하여 적선 63척을 불살라버리니, 잔여 왜적 4백여 명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10일에 안골포(安骨浦)에 도착하니 적선 40척이 바다 가운데 벌여 정박하고 있었다. 그 중에 첫째 배는 위에 3층 큰집을 지었고, 둘째 배는 2층집을 지었으며, 그 나머지 모든 배들은 물고기 비늘처럼 차례대로 진을 결성하였는데, 그 지역이 협착하였다. 아군이 두세 차례 유인하였으나 왜적은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사들이 들락날락하면서 공격하여 적선을 거의 다 불살라버렸다. 이 전투에서 3진(陣)이 머리를 벤 것이 2백 50여 급이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으며, 잔여 왜적들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였다.순신 등이 그의 군관(軍官) 이충(李沖)을 보내어 치계하고 수급(首級)을 바치도록 하니, 행조(行朝)에서는 상하가 뛸듯이 기뻐하며 경하(慶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6월 21일 4번째 기사時, 東萊旣陷, 賊長驅直進, 所向無前, 大駕旣入西路, 黃海以南, 至于東萊, 惟聞敗報, 絶無他信。

慶尙右水使元均, 與全羅左水使李舜臣, 約會閑山島。

時舜臣以戰船八十艘, 乃於是年五月初六日, 進至玉浦前洋, 有賊船三十餘艘, 四面圍帳, 竪立長竿, 亂懸紅白旗, 餘賊登陸, 焚怯閭家。

賊見舟師, 促櫓出陣, 與我軍相遇於洋中, 我軍焚賊船二十六艘。

約以明日更擧大戰, 聞大駕西幸, 諸將不到, 仍爲相聚痛哭, 乃於初九日, 各還本鎭。

二十九日, 舜臣、元均再會於露梁, 遇賊一船焚之, 俄見海邊一山, 有賊百餘長蛇而陣, 其下有戰船十二艘, 緣崖列泊。

時早潮已退水淺, 大舟不得進。

舜臣曰: "我佯退, 賊必乘船追我, 引出洋中, 巨艦合擊, 蔑不勝矣。

" 回船未一里, 賊果乘船追之。

我軍令龜船突進, 先放大小銃筒, 盡燒其船, 餘賊遠望頓足叫呼。

方戰鐵丸中舜臣左肩。

初二日到唐浦, 賊船二十艘, 列泊江岸, 中有一大船, 上設層樓, 外垂紅羅帳, 賊酋着金冠錦衣, 手執金扇, 指揮諸賊。

中衛將權俊, 回船促櫓, 直衝其下, 撞破其船, 仰射賊酋, 應弦而倒。

初四日進至唐浦前洋, 全羅右水使李億祺, 領戰船二十五艘來會, 諸將無不增氣。

初五日出外洋, 聞賊船移泊於固城 唐項浦中洋, 舜臣先遣三船, 往探形勢, 纔出海口, 卽放砲告變。

諸軍一時促櫓, 首尾連亘, 魚貫而進, 至召所江, 賊船二十六艘, 擺列江岸, 中有一大船, 上設三層板閣, 後垂黑綃帳, 前竪靑蓋, 帳內諸賊, 擺列侍立。

諸軍初一交戰, 佯敗而退, 層閣大船, 懸帆先出。

諸軍挾擊, 賊酋中箭而死。

諸軍乘勝縱火, 焚賊船一百餘艘, 斬賊首二百一十餘級, 溺水死者不記其數。

初六日, 追餘賊於外洋, 又焚一船, 初九日, 諸軍罷兵還鎭。

七月初六日, 舜臣與億祺會于露梁, 元均修緝破船七艘, 先來留泊。

聞賊船七十餘艘, 自永登浦, 移泊於見乃梁。

初八日, 舟師至中洋, 賊見我軍盛, 促櫓而歸, 諸軍追至, 則賊船七十餘艘, 列陣於內洋, 地勢狹窄, 且多險嶼, 難以行船。

我軍進退誘引, 賊果悉衆追之, 引出于閑山前洋。

我軍擺列爲鶴翼陣, 揮旗鼓譟, 一時齊進, 連放大小銃筒, 先破賊船三艘, 賊氣挫少却, 諸將軍吏, (勸)〔歡〕 呼踴躍。

乘銳崩之, 箭丸交發, 焚賊船六十三艘, 餘賊四百餘名, 棄船登陸而走。

初十日, 至安骨浦, 賊船四十艘, 列泊洋中。

其中一船, 上建三層大屋, 二船建二層屋, 其餘諸船, 鱗次結陣, 其地狹窄。

我軍再三誘引, 賊懼不敢出, 我軍出入搏戰, 幾盡燒之。

是役也, 三陣所斬二百五十餘級, 溺水死者, 不記其數, 餘賊乘夜而遁。

舜臣等遣其軍官李冲, 馳啓獻級, 行朝上下, 無不踴躍稱慶。

【冲之來也, 上問以嶺南之事, 對曰, 聞監司金睟在咸陽云, 而聲問不通。

賊由直路而上, 故左右道分爲兩界, 號令不通云。

】朝鲜王朝实录 宣祖实录 宣祖25年 6月21日 第四纪事비변사가 아뢰기를,"경상 수사(慶尙水使) 원균(元均)의 승첩을 알리는 계본(啓本)은 바로 얼마 전 이순신(李舜臣)이 한산도(閑山島) 등에서 승리한 것과 한때의 일입니다. 싸움에 임해서는 수종(首從)이 있고 공에는 대소가 있는 것이어서 그 사이에 차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확실히 알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적을 벤 것으로써 대략을 논하면, 힘을 다하여 혈전했음에는 의심이 없습니다. 다시 1등에 참여된 이는 마땅히 별도로 포상을 하여야 할 듯합니다. 첨사(僉使) 김승룡(金勝龍), 현령(縣令) 기효근(奇孝謹)은 특별히 당상(堂上)에 올리고, 현감(縣監) 김준계(金遵階)는 3품으로 승서(陞敍)하고, 주부(主簿) 원전(元㙉)은 5품으로 승서하고, 우치적(禹致績) 등 4인은 6품으로 승서하고, 이효가(李孝可) 등 13인은 공에 맞는 관직을 제수하소서. 만호(萬戶) 한백록(韓百祿)은 전후 공이 가장 많은데 탄환을 맞은 뒤에도 나아가 싸우다가 싸움이 끝나고 오래지 아니하여 끝내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극히 슬프고 애처로운 일이니, 또한 당상(堂上)으로 추증하소서. 배지인(陪持人) 박치공(朴致恭)은 3급(級)을 베고 왜적 한 명을 사로잡았으니 6품으로 승서함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답하기를,"이에 의하여 조처해야 한다. 원균에게는 가자(加資)를 하지 않는가?"하였는데, 회계(回啓)하기를,"원균은 이미 높은 가자를 받았고 지금 이 전첩(戰捷)의 공은 이순신이 으뜸이므로 원균에게는 가자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8월 24일 2번째 기사備邊司啓曰: "慶尙道 元均獻捷啓本, 卽頃日李舜臣 閑山等島一時事也。

臨戰首從, 功之大小, 必有差等於其間。

而在此的知爲難。

以斬敵論大槪, 戮力血戰則無疑。

再參一等, 似當別爲褒賞。

僉使金勝龍、縣令奇孝謹特陞堂上, 縣監金遵階三品陞敍, 主簿元㙉五品陞敍, 禹致績等四人六品陞敍, 李孝可等十三人相當職除授。

萬戶韓百祿前後之功最多, 而至於中九之後進戰, 戰罷不久, 竟至於死。

極爲慘惻, 亦堂上追賜。

陪持人朴致恭斬三級、生擒一倭, 六品陞敍何如?" 答曰: "當依此爲之矣。

元均則不爲加資乎?" 回啓曰: "元均已受重加, 且今玆戰捷之功, 李舜臣爲主, 元均似不必加資矣。

"朝鲜王朝实录 宣祖实录 宣祖25年 8月21日 第二纪事其他影评的都讲错了,或者是精神有问题的碍国喷、🐶篮子之胡说十道。

我这才对当时历史的真实记录。

 9 ) 闲山岛大捷的历史

이때 동래(東萊)가 이미 함락되어 왜적들이 계속 몰아쳐 곧장 진격하니 가는 곳마다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대가가 이미 서로(西路)로 들어가자 황해도 이남에서 동래까지 오직 패전 소식만 들려오고 전혀 다른 소식은 없었다.그런데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은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과 약속하여 한산도(閑山島)에서 회합하였다. 이때에 이순신이 전선(戰船) 80척을 거느리고서 마침내 이해 5월 6일에 옥포(玉浦) 앞바다로 나아가니, 적선(賊船) 30여 척이 사면에 휘장을 두르고 길다란 장대를 세워 홍기(紅旗)·백기(白旗)들을 현란하게 달았으며, 나머지 왜적들은 육지로 올라가 마을 집들을 불사르고 겁탈하였다. 왜적들은 수군(水軍)을 보고는 노(櫓)를 빨리 저어 진지(陣地)를 나와 아군(我軍)과 바다 가운데서 만났는데 아군이 적선 26척을 불살라 버렸다. 이튿날 다시 대전(大戰)을 전개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행행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여러 장수들이 도착하지 않아, 그대로 서로 모여 통곡하고는 마침내 9일에 제각기 본진(本鎭)으로 돌아갔다.29일에 순신과 원균이 재차 노량(露梁)에서 회합하여 적선 1척을 만나 불살라버렸는데, 조금 후에 보니 바닷가 한 산에 왜적 1백여 명이 장사진(長蛇陣)을 치고 있고 그 아래로는 전선 12척이 벼랑을 따라 죽 정박하고 있었다. 때마침 일찍 들어온 조수(潮水)가 벌써 빠져나가 바닷물이 얕아져서 큰 배는 나아갈 수 없었다. 순신이,"우리가 거짓 퇴각하면 왜적들이 반드시 배를 타고 우리를 추격할 것이니 그들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큰 군함(軍艦)으로 합동하여 공격하면 승전(勝戰)하지 못할 리가 없다."하고서, 배를 돌렸다. 1리를 가기도 전에 왜적들이 과연 배를 타고서 추격해 왔다. 아군은 거북선으로 돌진하여 먼저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쏘아대어 왜적의 배를 모조리 불살라버리니, 나머지 왜적들은 멀리서 바라보고 발을 구르며 울부짖었다. 한창 전투할 적에 철환(鐵丸)이 순신의 왼쪽 어깨를 명중하였다.2일에 당포(唐浦)에 도착하니 적선 20척이 강 연안에 죽 정박하였는데, 그 중에 큰배 한 척은 위에 층루(層樓)를 설치하고 밖에는 붉은 비단 휘장을 드리워놓고서, 적장(賊將)이 금관(金冠)에 비단옷을 입고 손에 금부채를 가지고서 모든 왜적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중위장(中衛將) 권준(權俊)이 배를 돌려서 노를 재촉하여 바로 그 밑으로 돌진하여 그 배를 쳐부수고, 적장을 쳐다보고 활을 쏘니 시위를 놓자마자 적장이 거꾸러졌다. 4일에 당포(唐浦) 앞바다로 나아가자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李億祺)가 전선 25척을 거느리고 와 회합하니 여러 장수들이 기운이 증가되지 않는 이가 없었다.5일에 외양(外洋)으로 나가다가 적선이 고성(固城) 당항포(唐項浦) 앞바다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듣고, 순신이 배 3척을 먼저 보내어 형세를 정탐하도록 하였는데, 겨우 바다 어귀를 나가자마자 바로 포(砲)를 쏘아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모든 군사들이 일시에 노를 재촉하여 앞뒤를 고기꿰미처럼 연결하여 나아가 소소강(召所江)에 이르니 적선 26척이 강 연안에 죽 벌여 있었다. 그 중에 큰배 한 척은 위에 3층 판각(板閣)을 설치하고 뒤에는 검은 비단 휘장을 드리우고 앞에는 푸른 일산을 세워 놓았으며, 휘장 안에는 여러 왜적들이 죽 나열하여 시립하고 있었다. 모든 군사들이 처음 한번 교전하고 거짓 패한 척하여 퇴각하니, 층각을 세운 큰배가 돛을 달고 먼저 나왔다. 모든 군사들이 양쪽에서 공격하니 적장이 화살을 맞고 죽었다. 그러자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 불을 질러 적선 1백여 척을 소각해 버리고 왜적의 머리 2백 10여 급(級)을 베었으며 물에 빠져 죽은 적은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었다. 6일에 잔여 왜적을 외양(外洋)에서 추격하여 또 한 척을 불살라버렸으며, 9일에 모든 군사가 전투를 중지하고 본진으로 돌아왔다.7월 6일에 순신이 억기와 노량에서 회합하였는데, 원균은 파선(破船) 7척을 수리하느라 먼저 와 정박하고 있었다. 적선 70여 척이 영등포(永登浦)에서 견내량(見乃粱)으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8일에 수군이 바다 가운데 이르니, 왜적들이 아군이 강성한 것을 보고 노를 재촉하여 돌아가자 모든 군사가 추격하여 가보니, 적선 70여 척이 내양(內洋)에 벌여 진을 치고 있는데 지세(地勢)가 협착한 데다가 험악한 섬들도 많아 배를 운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군이 진격하기도 하고 퇴각하기도 하면서 그들을 유인하니, 왜적들이 과연 총출동하여 추격하기에 한산(閑山) 앞바다로 끌어냈다.아군이 죽 벌여서 학익진(鶴翼陣)을 쳐 기(旗)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떠들면서 일시에 나란히 진격하여,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연속적으로 쏘아대어 먼저 적선 3척을 쳐부수니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조금 퇴각하니, 여러 장수와 군졸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발을 구르고 뛰었다. 예기(銳氣)를 이용하여 왜적들을 무찌르고 화살과 탄환을 번갈아 발사하여 적선 63척을 불살라버리니, 잔여 왜적 4백여 명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10일에 안골포(安骨浦)에 도착하니 적선 40척이 바다 가운데 벌여 정박하고 있었다. 그 중에 첫째 배는 위에 3층 큰집을 지었고, 둘째 배는 2층집을 지었으며, 그 나머지 모든 배들은 물고기 비늘처럼 차례대로 진을 결성하였는데, 그 지역이 협착하였다. 아군이 두세 차례 유인하였으나 왜적은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사들이 들락날락하면서 공격하여 적선을 거의 다 불살라버렸다. 이 전투에서 3진(陣)이 머리를 벤 것이 2백 50여 급이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으며, 잔여 왜적들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였다.순신 등이 그의 군관(軍官) 이충(李沖)을 보내어 치계하고 수급(首級)을 바치도록 하니, 행조(行朝)에서는 상하가 뛸듯이 기뻐하며 경하(慶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6월 21일 4번째 기사時, 東萊旣陷, 賊長驅直進, 所向無前, 大駕旣入西路, 黃海以南, 至于東萊, 惟聞敗報, 絶無他信。

慶尙右水使元均, 與全羅左水使李舜臣, 約會閑山島。

時舜臣以戰船八十艘, 乃於是年五月初六日, 進至玉浦前洋, 有賊船三十餘艘, 四面圍帳, 竪立長竿, 亂懸紅白旗, 餘賊登陸, 焚怯閭家。

賊見舟師, 促櫓出陣, 與我軍相遇於洋中, 我軍焚賊船二十六艘。

約以明日更擧大戰, 聞大駕西幸, 諸將不到, 仍爲相聚痛哭, 乃於初九日, 各還本鎭。

二十九日, 舜臣、元均再會於露梁, 遇賊一船焚之, 俄見海邊一山, 有賊百餘長蛇而陣, 其下有戰船十二艘, 緣崖列泊。

時早潮已退水淺, 大舟不得進。

舜臣曰: "我佯退, 賊必乘船追我, 引出洋中, 巨艦合擊, 蔑不勝矣。

" 回船未一里, 賊果乘船追之。

我軍令龜船突進, 先放大小銃筒, 盡燒其船, 餘賊遠望頓足叫呼。

方戰鐵丸中舜臣左肩。

初二日到唐浦, 賊船二十艘, 列泊江岸, 中有一大船, 上設層樓, 外垂紅羅帳, 賊酋着金冠錦衣, 手執金扇, 指揮諸賊。

中衛將權俊, 回船促櫓, 直衝其下, 撞破其船, 仰射賊酋, 應弦而倒。

初四日進至唐浦前洋, 全羅右水使李億祺, 領戰船二十五艘來會, 諸將無不增氣。

初五日出外洋, 聞賊船移泊於固城 唐項浦中洋, 舜臣先遣三船, 往探形勢, 纔出海口, 卽放砲告變。

諸軍一時促櫓, 首尾連亘, 魚貫而進, 至召所江, 賊船二十六艘, 擺列江岸, 中有一大船, 上設三層板閣, 後垂黑綃帳, 前竪靑蓋, 帳內諸賊, 擺列侍立。

諸軍初一交戰, 佯敗而退, 層閣大船, 懸帆先出。

諸軍挾擊, 賊酋中箭而死。

諸軍乘勝縱火, 焚賊船一百餘艘, 斬賊首二百一十餘級, 溺水死者不記其數。

初六日, 追餘賊於外洋, 又焚一船, 初九日, 諸軍罷兵還鎭。

七月初六日, 舜臣與億祺會于露梁, 元均修緝破船七艘, 先來留泊。

聞賊船七十餘艘, 自永登浦, 移泊於見乃梁。

初八日, 舟師至中洋, 賊見我軍盛, 促櫓而歸, 諸軍追至, 則賊船七十餘艘, 列陣於內洋, 地勢狹窄, 且多險嶼, 難以行船。

我軍進退誘引, 賊果悉衆追之, 引出于閑山前洋。

我軍擺列爲鶴翼陣, 揮旗鼓譟, 一時齊進, 連放大小銃筒, 先破賊船三艘, 賊氣挫少却, 諸將軍吏, (勸)〔歡〕 呼踴躍。

乘銳崩之, 箭丸交發, 焚賊船六十三艘, 餘賊四百餘名, 棄船登陸而走。

初十日, 至安骨浦, 賊船四十艘, 列泊洋中。

其中一船, 上建三層大屋, 二船建二層屋, 其餘諸船, 鱗次結陣, 其地狹窄。

我軍再三誘引, 賊懼不敢出, 我軍出入搏戰, 幾盡燒之。

是役也, 三陣所斬二百五十餘級, 溺水死者, 不記其數, 餘賊乘夜而遁。

舜臣等遣其軍官李冲, 馳啓獻級, 行朝上下, 無不踴躍稱慶。

【冲之來也, 上問以嶺南之事, 對曰, 聞監司金睟在咸陽云, 而聲問不通。

賊由直路而上, 故左右道分爲兩界, 號令不通云。

】朝鲜王朝实录 宣祖实录 宣祖25年 6月21日 第四纪事비변사가 아뢰기를,"경상 수사(慶尙水使) 원균(元均)의 승첩을 알리는 계본(啓本)은 바로 얼마 전 이순신(李舜臣)이 한산도(閑山島) 등에서 승리한 것과 한때의 일입니다. 싸움에 임해서는 수종(首從)이 있고 공에는 대소가 있는 것이어서 그 사이에 차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확실히 알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적을 벤 것으로써 대략을 논하면, 힘을 다하여 혈전했음에는 의심이 없습니다. 다시 1등에 참여된 이는 마땅히 별도로 포상을 하여야 할 듯합니다. 첨사(僉使) 김승룡(金勝龍), 현령(縣令) 기효근(奇孝謹)은 특별히 당상(堂上)에 올리고, 현감(縣監) 김준계(金遵階)는 3품으로 승서(陞敍)하고, 주부(主簿) 원전(元㙉)은 5품으로 승서하고, 우치적(禹致績) 등 4인은 6품으로 승서하고, 이효가(李孝可) 등 13인은 공에 맞는 관직을 제수하소서. 만호(萬戶) 한백록(韓百祿)은 전후 공이 가장 많은데 탄환을 맞은 뒤에도 나아가 싸우다가 싸움이 끝나고 오래지 아니하여 끝내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극히 슬프고 애처로운 일이니, 또한 당상(堂上)으로 추증하소서. 배지인(陪持人) 박치공(朴致恭)은 3급(級)을 베고 왜적 한 명을 사로잡았으니 6품으로 승서함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답하기를,"이에 의하여 조처해야 한다. 원균에게는 가자(加資)를 하지 않는가?"하였는데, 회계(回啓)하기를,"원균은 이미 높은 가자를 받았고 지금 이 전첩(戰捷)의 공은 이순신이 으뜸이므로 원균에게는 가자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8월 24일 2번째 기사備邊司啓曰: "慶尙道 元均獻捷啓本, 卽頃日李舜臣 閑山等島一時事也。

臨戰首從, 功之大小, 必有差等於其間。

而在此的知爲難。

以斬敵論大槪, 戮力血戰則無疑。

再參一等, 似當別爲褒賞。

僉使金勝龍、縣令奇孝謹特陞堂上, 縣監金遵階三品陞敍, 主簿元㙉五品陞敍, 禹致績等四人六品陞敍, 李孝可等十三人相當職除授。

萬戶韓百祿前後之功最多, 而至於中九之後進戰, 戰罷不久, 竟至於死。

極爲慘惻, 亦堂上追賜。

陪持人朴致恭斬三級、生擒一倭, 六品陞敍何如?" 答曰: "當依此爲之矣。

元均則不爲加資乎?" 回啓曰: "元均已受重加, 且今玆戰捷之功, 李舜臣爲主, 元均似不必加資矣。

"朝鲜王朝实录 宣祖实录 宣祖25年 8月21日 第二纪事这才是当时历史的真实记录。

 10 ) 国内的空白让我当历史片来看

万历年间的抗倭援朝战争是很提气的一场战争,我想在银幕上看到李如松、李如柏所率明军最后的神勇,想看到丰臣秀吉时代所谓将星如云的小西行长、藤堂高虎、九鬼嘉隆的狼狈溃败,想看到规模使用火炮的明军炮轰拿火枪穿竹甲的日寇……可惜我们的导演编剧忙着穿越和胡编乱造历史剧,逼得我只能拿韩国的片子当历史片来看了。

李舜臣的几场局部战役被韩国无限拔高,甚至阻止了日寇天津登陆的企图,挽救了大明。

这么任意打扮,熟悉历史的也就一笑了之,你怨不得别人,你自己不屑一顾,只能由着别人说呗!

彼时朝鲜的军制、武器基本和大明一致,语言文字也一致,韩国历史题材电影的服化道都比较认真,因此我也是当历史片来看,努力从韩国将领身上寻找中国历史印记,这不得不说是一个悲哀。

又想起国师的《满江红》,你尊重历史,好好拍个岳家军抗金、十二道金牌召回、风波亭,弘扬爱国主义,不好吗?

《闲山:龙的出现》短评

第一部我是为了看崔岷植,第二部没有崔岷植我还有什么看头?过于拖沓时长太久观感不佳

3分钟前
  • 不羈的賓周
  • 还行

海战部分看的还算过瘾,情节部分可以1.5倍速不影响观影体验。小花演鬼子,还是觉得更像是韩国人。

6分钟前
  • 啊牧amua
  • 还行

画面制作比较精良,过程好无聊吧,动作戏太少了,铺垫太多了吧,以为多牛批,就这。

10分钟前
  • 相遇
  • 较差

看了下地图 相当于在釜山外海一些小岛的战争 前段节奏很慢 战场上还行

11分钟前
  • 知儿滴迪
  • 推荐

以为导演要拍出有多么智慧的片子 搞到最后原来韩国人发明了航空母舰,爱国题材永远是韩国中国的票房保证

12分钟前
  • Shufeng
  • 较差

我觉得其中一个日军叛变的这个剧情 很弱智...这个理由 就是因为自己上级对自己部下不够体面就叛变...还有这个龟船..我好奇历史上是不是真的有这样的船只,朝鲜当年的海军科技水平有这么高??感觉跟个海上坦克似的 又能冲又能撞 还有这个朝鲜女 竟然没死 ??不是咬舌自尽了嘛??这个演员演的李勋臣...真的是...太文质彬彬了 槽点一大堆.海战总的来讲拍得还是不错的,大场面还是保持一部的总体水平,但是总的来讲跟第一部来讲还是有很大差距.这部意淫得不够好看呀!

16分钟前
  • 梧桐树下你和我
  • 较差

这样拍下去,甲午海战也能拍成是抄袭韩国了吧,而且还没打赢!

20分钟前
  • hileon
  • 较差

韩国人真的会意淫啊

25分钟前
  • 蜉蝣
  • 较差

李舜臣刻画太扁平,完全不如崔岷植版坚忍刚毅。剧情刻画也是一言难尽,日军的内斗莫名其妙,感觉就是为了水时长,而关键配角间谍的投诚理由的也是生硬无比,还有国君逃亡边境,朝军内部是战是守这一重要战略分歧没有着重刻画,整部影片简直就是部韩版《赤壁-下》

30分钟前
  • 听海
  • 较差

壮观的。

35分钟前
  • Covfefe
  • 力荐

适合韩国战狼们意淫抗日大捷时食用

39分钟前
  • 以后再说
  • 较差

只一个李舜臣的故事,被韩国人翻来覆去的不知道拍了多少遍。我很好奇,号称同样拥有「五千年历史」的高句丽真的就没个其他能拿得出手的 「民族英雄」了?说是前传,但剧本、特效、剪辑调度、氛围感,均不能与《鸣梁海战》相比。韩国暑期档第一「爆款」电影,在我看来吸引力远不如同期老马的《犯罪都市2》。(闲山海战,鸣梁海战之后,什么时候韩国人也拍个露梁海战,让我大明海军威风威风了。)

44分钟前
  • 周宇勋
  • 很差

还行

48分钟前
  • 不加糖
  • 还行

鸣梁海战还能看个热闹,这部就太伪了

52分钟前
  • 光叔写作文
  • 较差

拍的太真实了,看的让人身临其境!李舜臣是大英雄!

56分钟前
  • qnmdgscgr
  • 力荐

没有第一部那么精彩,但是比第一部更真实。

59分钟前
  • Wingmen
  • 力荐

一次团级的海战被拍成中途岛

1小时前
  • 曼特宁
  • 还行

抗倭神剧减一星。拍得场面不错。

1小时前
  • 北风来袭
  • 推荐

虽然2个多小时,但是一点也不拖沓,海战场面太好看了!!!“这是一场正义的战场,所有人抱着同一个信念而战。”;论别人的电影日语不用配音这件事。

1小时前
  • 阿不呆
  • 力荐

壬辰倭乱的转折点,闲山岛海战。/敌前大转向换成了李舜臣。不是胁坂安治不努力,奈何对面有李云龙(笑)。不过,让胁坂安治骑在加藤嘉明和九鬼嘉隆头上是不是也太魔改了点。/片中脸谱化的李舜臣还不如间谍演得好点。

1小时前
  • 海姆达尔
  • 推荐